시의 속성 중 하나로 동일화(identify) 기능이 있다. 너와 나, 세계와 자아를 일체화 된 것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물아일체며 주객일체라는 말 역시 동일한 개념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과 정신은 낭만주의적이며 비현실적이며 비논리적이라는 평가로 인해 터부시되고 있다. 특히 과학 만능의 이 가혹한 사실주의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는 혐의까지 받고 있다.

우리는 인지가 발달할수록 세계를 섬세하고 미시적으로 이해하며 또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유아기 때는 인형과 인간, 강아지와 인간, 나무와 동물도 같은 레벨로 인지한다. 인지가 발달할수록 사물들 사이의 차이(differences)에 민감해진다. 그리하여 인형과 강아지는 인간과 다르며, 나무와 동물도 다른 종이라는 지식을 습득한다. 지식이 축적될수록 세계는 더욱 미시적으로 분할되고 분리된다. 분류(classification) 작업이 더욱 왕성하고 활발해진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독자성과 고유성을 확립하려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나는 남자 너는 여자, 나는 전라도 너는 경상도, 나는 일등 너는 꼴등, 나는 범생이 너는 왕따, 나는 한국인 너는 일본인 등 의식이 활동하는 내내 차이만을 인식하고 강조한다.

심지어 자아조차도 리비도, 에고, 수퍼에고 등으로 구분한다. 이러한 미시적 분할과 분류 끝에 남는 것은 깊고 창망한 인식의 우물뿐이다. 우물 깊은 곳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손바닥 아니면 손수건만할 뿐이다. 세상은 정저지와(井底之蛙)의 시야만으로 파악된다. 결국 너로부터 멀어지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나는 너로부터 나아가 자아로부터도 소외되고 버림받는다. 그래서 현대인의 정서는 소외와 고독으로 대변된다. 모두들 함께 더불어 사는 것 같지만 언제나 단독자일 뿐이다. 외롭고 쓸쓸함이 우리 삶의 대표적 정조가 된다.

분류와 차별은 미시적 과학의 명징성을 주는 대신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사유의 힘을 약화시켰다. 또한 이 차이는 배척과 갈등의 불씨 아니면 불쏘시개로 기능한다. 차이는 너무 쉽게 배타와 차별로 둔갑하곤 한다. 지구상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갈등과 알력의 저변에는 이 차이가 잠복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상 그 어느 존재나 사랑과 평화와 안녕을 희망하고 갈구한다. 그 소망이 구두선에 그치고 말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몸소 분류의 사유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아니 앞장서 분류의 사색 대신 종합과 동일화의 정신으로 세계를 삶을 응시해야 한다. 세상은 서로 다른 다양한 존재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아니 우주의 모든 존재는 거대한 연쇄(Great chain)를 이루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를 돕는 데에는 시적 통찰력, 신화적 상상력, 동일화의 정신이 효과적이다. 하여 우리 모두 시를 읽자. 신화를 열람하자. 돌과 나무, 별과 달, 고래와 호랑이까지 의인화하자. 만국의 평화를 위하여. 삼라만상의 행복한 유대를 위하여. 우주의 안녕을 위하여. 제발 시 좀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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