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학을 포함한 전국의 대학들이 중간고사 기간을 맞이했다. ‘시험을 치러야 한다’라는 것에서 뭔가 꽉 막히는 답답함이 엄습해 오는 것은 대학생활에서 느꼈던 시험에 대한 별로 즐겁지 않았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일치기 시험 준비를 하느라 골치를 앓아 봤을 것이다. 예전에는 당일치기 시험과 관련해 ‘형광펜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었다. 시험 전날 밤 시험을 벼락치기로 암기하기 위해 형광펜으로 교과서 여기저기에 줄을 치는 현상을 말한다. 시험이 끝나면 형광펜으로 칠했던 데이터는 머리 속에서 삭제되기 마련이다. 학생이 시험 준비를 하는 모습은 어쩌면 내가 학생들에게 시험문제를 내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험문제들이 고전 물리학의 틀에서 직접 따온 인과율의 개념에 입각한 벼락치기식 문제가 많았던 것 같다. 나는 학생들의 ‘형광펜 증후군’을 만들어낸 공범이었던 것이다.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이 답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평범한 교육적 진리를 무시한 채 말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교육은 이분법적 사고와 단편적인 지식만을 요구하는 시대가 아니다. 결과를 요구하는 교육이 아닌 과정을 중시하는 교육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고립된 인과관계의 연속체가 아니라 다양성과 차이성을 인정하는 상호 연관된 현상의 그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교육은 어떠한가? 대학사회에서 가장 근대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교수와 학생의 관계이다. 현재 대학은 교육뿐만 아니라 교육환경에서도 분업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사제간의 신뢰와 존경을 바탕으로 한 상호관계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분업화된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처럼 그저 요구하는 내용만을 처리하고 있는 기계론적 사고관에 박혀 있는 듯 하다.

얼마 전에 읽은 신문에 실려 있는 글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해봤다. 교수 연구실에 찾아온 학생과의 대화를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작업을 하면서 대화하는 교수들에 관한 기사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의 대학생활이 어느 정도 반영된 모습이 아닌가 싶다. 나는 얼마나 학생들과 진실하게 대화를 하고 있을까? 학생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대신 교수를 기쁘게 하는 법을 배우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학생들을 양산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도 모르게 형광펜 증후군의 교육을 시키지 않았는가?

이 글을 쓰면서 문득 퇴계 이황의 가훈 하나를 생각한다. ‘한 글자를 배워도 가르친 이의 덕을 더불어 배우게 되는 것이니 먼저 스승이 될 이의 처지를 보고 그 덕행을 보라,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고 가르침에 넉넉함이 있거든 이 사람을 스승으로 택하여 가르침을 받도록 하라’.

먼 훗날, 내가 정년을 하고 난 이후라도 상관없다. 그저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존경했던 나의 은사님께 드렸던 그 말을 듣고 싶다. ‘교수님! 저를 비롯한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수많은 제자들은 교수님께 학문과 더불어 교수님의 열정과 덕을 함께 배웠습니다, 교수님께서 학문과 교육에 온 힘을 기울여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동안 저희들은 그 가르침과 함께 또한 교수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나도 그런 교수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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