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펼쳐든 신문의 작은 기사 한 토막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다. 그 기사는 1급 시각장애를 가진 여학생이 2학기 연속으로 대학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는 훈훈한 미담이었다. 그녀의 대학생활이 가능했던 이면에는 부모님이나 도우미 학생부터 안내견 ‘미담이’까지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운 많은 이들의 뒷받침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녀를 위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고 우리 사회가 장애인들에게 제공해야할 배려임에 분명하다. 오히려 ‘손이 많이 가는 학생’이라며 자신을 낮추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손 벌리는데 익숙한 건 아닌지 또 부모님께 여전히 신경 쓰이는 존재는 아니었는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아침까지 잠에서 허우적대다가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고 일어난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을 꾸역꾸역 먹고 집을 나섰지만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쳐 아버지의 차에 올라탄다. 힘들게 오전수업에 들어가니 집중이 되질 않아 딴 생각에 젖는다. 오후에 있었던 조모임에서는 틀린 말을 할까 입 한번 떼보지도 못했다. 남들 하던 대로 따라만 하면 무난하게 지낼 수 있던 고등학교 시절이 새삼 부러워진다.
신문에 난 장애 여학생과는 대조적으로 최근 눈에 자주 띄는 ‘캥거루족’들이 떠오른다. 이들은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기보다 부모님이 원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 안달 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부모의 과보호 아래 자란 자녀들의 특징이다.
부모 역시 대학 입시에 대량 실업사태 속에 시달리는 아들, 딸들이 안쓰러워 보여서일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최근 들어 대학생 자녀의 학과생활은 물론 취업과 직장 생활까지 관여라는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단다. 자녀양육에 엄청난 관심과 물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그들은 다 커버린 자식들의 일상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저 대학 초년생들이 겪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이런 부모와 자식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 하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모습이 대학생들의 전부는 아니다. 대학 등록금을 스스로 벌며 타지에 나와 고생하는 친구들도 많다. 개중에는 학점관리는 물론 사회봉사, 공모전·어학·자격증 준비 등 자기 앞가림을 분명하게 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들에게 없는 것은 바로 두려움과 나태함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혼자 하면 왠지 불안하고 실패할 것 같은 이러한 감정들은 부모, 친구와 떨어져본 적이 없는 대학생들을 더욱더 수동적이고 의존적으로 변하게 만든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중간 역에서 대학생들에게 ‘세상 아래 나 혼자’라는 감정은 아직 익숙치 않은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하려는 독립심, 자립심을 기르기보다 온실 속에서 편한 길만 쫓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정호승 시인은 외로움에 대해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면서. 또한 요절한 시인 기형도는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고 했다. 혼자를 두려워하지 말자. 외로움을 겁내지 말자. 먼 훗날 누구보다 당당할 그대들의 봄날은 혼자의 나날들을 의연하게 견뎌내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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