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David Berreby, 정준형 옮김, 애코리브르, 2007
그러고 보니 나의 그런 ‘취향’이 지금의 내 생각이나 심정과 잘 맞아떨어진다. 요즘 내 머리를 지배하는 의제는 ‘편가르기’에 대한 혐오와 저주다. 이건 나의 경험 탓이다. 매우 양심적이고 정의롭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편가르기’의 포로가 되어 폭력적인 광신도로 전락하는 걸 많이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전엔 열정을 예찬했지만, 이젠 열정이 무섭다. 열정과 광신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는 걸 절감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늙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늙었건 젊었건, ‘편가르기’엔 혐오와 저주를 보내는 게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지 않을까? 자신이 소속된 ‘편’이나 ‘패거리’ 내부에서 만끽하는 행복은 반드시 남의 불행을 전제로 한다는 걸 깨닫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문제의식에 잘 부합하는 책이 데이비드 베레비(David Berreby)의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이다.
이 책의 장점은 그간 우리가 믿어온 상식의 전복을 과감하게 시도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을 거의 진리처럼 믿지만, 과연 그럴까? 서로 비슷한 사람들과 한패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더라도, 중요한 건 한패가 되고 나서 비슷하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 극성을 부렸고 이명박 정권 들어 극단을 보이고 있는 이른바 ‘코드 인사’를 보자. ‘코드’는 이념과 정치적 성향이기 때문에 ‘코드 인사’는 꼭 필요하다는 게 두 정권 인사권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과연 그런가? 거칠게 표현하자면, ‘개소리’라고 일축하는 게 좋다. 코드의 본질은 연고·정실·이해관계이며, 이념과 정치적 성향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증거들이 매일 언론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지 않는가. 베레비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가슴에 와 닿는다.
“사상이 일단 깃발이 되고 나면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다. 우선 그것을 사용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그 사상이 대변하는 인간 부류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갈라서게 되는 것이다. 사상 자체도 자유로운 길을 택할 수 없다. 생각을 바꾸고자 하면, 인간 부류의 코드가 함께 싸우는 형제들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념과 정치적 성향이 다르더라도 그것이 ‘편가르기’와 그에 따른 ‘승자 독식주의’ 체제를 정당화하진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한다. 싫은 사람, 미운 사람도 손잡고 같이 가야 한다. 어려울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화이부동의 정신으로 충만한 젊음과 늙음을 꿈꿔본다.
강준만 교수┃사회대·신문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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