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하늘, 자유를 위한 외침이 숨쉬다

기와 가득한 한옥부터 광활한 지평선, 황금빛 서해까지. 마음만 있다면 닿을 수 있는, 전북의 아름다운 여행지들이 있다. 이곳은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어 방문객들의 마음을 흔든다. 전북대신문이 대중 교통과 도보로 누빌 수 있는 전북 곳곳의 명소를 취재했다. <편집자 주>

▲농민봉기의 횃불을 지핀 무장기포지

▲무장기포지에서 동학농민군이 훈련받았던 터다.
▲무장기포지에서 동학농민군이 훈련받았던 터다.

고창 문화터미널에서 공음면으로 향하는 길목 중 다리 위 횃불 모양의 조형물을 발견한다면 동학농민혁명기포지에 다다랐다는 의미다. 동학농민운동은 지난 1894년, 조선 봉건 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다.

고창 무장기포지의 이름에서 ‘무장’은 조선시대 지명이며 ‘기포지’는 포고문을 일으킨 장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분노해 지난 1894년 1월 10일 정읍 고부에서 봉기했으나 군수의 설득으로 해산했다. 하지만 고부민란을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 관련자를 역적죄로 몰아 탄압하며 농민에 대한 횡포가 극심해졌다. 이에 같은 해 3월 무장기포지에서 ‘무장포고문’을 선포하고 고부 백산으로 진격했다.

무장기포지는 소규모의 공원 형태로 조성됐으며 입장료 없이 관람할 수 있다. 이곳에는 동학농민운동 발상지 비, 동학농민혁명 포고문 비, 동학농민군 훈련장, 기념식수 소나무 3그루 등이 있다. 동학농민혁명 포고문 비에는 동학농민군의 4개의 행동강령인 사대 명의(四大名義)와 12개조 폐정개혁안 등 봉기의 목적과 행동 지침이 새겨져 있다. 무장기포지는 많은 사람이 집합, 훈련하기에 좋은 평지가 조성돼 동학농민군의 훈련장으로 이용됐다. 기념식수 3그루는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3명의 지도자를 상징한다. 가운데 소나무는 총대장 전봉준, 왼쪽은 총관령 김개남, 우측은 손화중이다.

현재는 고창동학농민혁명 성지화 사업이 진행 탓에 무장기포지에 있었던 일부 조형물을 인근에 있는 신왕초등학교로 임시 이전·설치했다. 신왕초등학교는 지난 2006년 폐교 후 현재는 동학농민운동 홍보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계절마다 색다른 매력을 가진 학원관광농장

▲지난 2일 사람들이 학원관광농장에서 열린 청보리밭 축제를 즐기고 있다.
▲지난 2일 사람들이 학원관광농장에서 열린 청보리밭 축제를 즐기고 있다.

4월 중순에서 5월 초, 무장기포지에서 무장읍성으로 향하는 길에는 심심치 않게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빛 물결을 발견할 수 있다.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곳은 4~5월에는 청보리와 유채꽃을 8월에는 해바라기, 10월에는 메밀꽃을 감상할 수 있다.

올해로 20회째 개최된 청보리밭 축제는 다채로운 문화공연, 이벤트, 체험행사 등을 진행했으며 지난 7일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청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거닐면 도심에서 만나기 힘들었던 청보리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다. 청보리의 싱그러운
색감은 예쁜 사진을 건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전망대에 오르면 드넓게 펼쳐진 청보리밭을 조망할 수 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청보리밭을 보며 눈도, 마음도 시원해지는 느낌을 단번에 받을 수 있다.

청보리란 보리가 누렇게 익기 전 푸릇한 때의 보리를 일컫는다. 고창은 옛날부터 보리를 많이 재배했고 보리농사가 잘되는 지역이었다. 고창의 옛 지명인 모양현(牟陽縣) 중 ‘모’는 보리를, ‘양’은 태양을 의미한다. 즉 햇볕을 받아 보리가 잘 자라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고즈넉한 조선의 성벽을 엿보다, 무장읍성

▲무장읍성의 남문 진무루의 모습이다.
▲무장읍성 남문 진무루의 모습이다.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등 깃발을 펄럭이며 무장읍성에 다다른다. 관군이 지키는 성문은 높고, 굳게 닫혀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기세에 눌린 관군을 이기고 무혈입성하며 환호한다. 고창군은 해마다 무장기포기념제를 진행한다. 매년 4월 25일에 무장읍성을 방문하면 무장기포지에서 출발한 동학농민군이 무장읍성에 다다른 현장을 엿볼 수 있다.

무장읍성의 입구인 남문 진무루를 지나면 성 내부로 들어서게 된다. 본래 무장읍성의 입구는 두 개였으나 현재 동문은 흔적만 남았고 남문 진무루는 태종 17년에 세워진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무장읍성 성내에는 객사, 동헌 등 옛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조선시대 읍성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진무루를 통과해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면 ‘송사지관(松沙之館)’이라 쓰인 현판이 걸린 무장객사가 자리하고 있다. 객사는 외국의 사신이나 조정 혹은 다른 지역에서 온 관직자가 오면 묵는 곳이자 동헌의 관리가 왕실에 예를 올리는 공간이다. 객사 왼쪽으로는 복원된 연못이, 뒤로는 동헌이 있다. 동헌은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중심 건물로 당시 무장현의 현감이 집무하던 공간이다. 현감이 소나무처럼 푸름을 간직하고 모래처럼 청백하게 정무를 보라는 뜻에서 취백당이라 이름 붙여졌다. 오른쪽으로는 읍취루라는 2층 누각이 자리하며 그 앞으로도 연못이 위치한다. 외부인들이 방문했을 때 읍취루에서 담소를 나누고 차를 마셨다.

성벽에 올라 둘레길을 따라 한 바퀴를 걸으면 약 30분 정도가 흐른다. 무장읍성은 흔히 알려진 고창읍성에 비해 관광객이 많지 않아 한적하게 사색을 즐기기에 좋은 장소다. 또한 나무가 많이 식재돼 있고 객사, 망루 등에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 돼있어 편하게 관람할 수 있다. 현재 무장읍성은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기에 앞으로의 모습이 더 기대되는 곳이다. 무장읍성 구경을 마치고 근처의 회전교차로에서 다시 고창 문화터미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으면 일정이 끝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동학농민운동을 말하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가사다. 전봉준은 어렸을 적부터 몸이 왜소해 별명이 녹두였다. 위 노래에서 녹두꽃은 전봉준, 파랑새는 일본군, 청포 장수는 조선 백성을 의미한다. 이 노래는 녹두꽃이 떨어진 것처럼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이 일본군에 의해 실패함으로써 많은 조선의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다.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에 일어나는 의병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우리나라가 근대 국가로 나아간 계기가 됐다. 동학농민운동 기념일인 5월 11일을 맞아 동학농민군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박의진 기자 pjeen1009@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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