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의 중심지에서 문화의 중심지로

기와 가득한 한옥부터 광활한 지평선, 황금빛 서해까지. 마음만 있다면 닿을 수 있는, 전북의 아름다운 여행지들이 있다. 이곳은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어 방문객 들의 마음을 흔든다. 전북대신문이 대중 교통과 도보로 누빌 수 있는 전북 곳곳의 명소를 취재했다. <편집자 주>
 

▲아픔은 예술이 되어, 삼례문화예술촌

▲일제강점기 양곡 창고의 형태가 남아 있는 삼례문화예술촌이다.
▲일제강점기 양곡 창고의 형태가 남아 있는 삼례문화예술촌이다.

전주 시내에서 30분가량 시내버스를 타고 삼례공용터미널에 도착해 삼례역로를 따라 15분 정도를 걸으면 오래된 양곡창고들이 방문객을 반긴다. 삼례문화예술촌은 목조구조 건물로 그 특이한 양식과 구조로 인해 처음 발을 디딘 이들에게 색다름을 주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복합문화공간의 용도로 사용되기 전까지 이곳은 두 차례 창고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양곡 수탈을 목적으로 한 번, 삼례농협 양곡 저장을 위해 한 번. 삼례의 씁쓸함이 담긴 이 공간은 2013년부터 삼례의 문화예술 재생 공간으로 사용되면서부터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는 등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탁 트여 뛰어놀기 좋은 야외마당을 지나 농협창고의 글씨가 적힌 문들을 열면 이곳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여러 전시를 만나 볼 수 있다. 1 전시관에서는 계절별로 그려진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화들이 보인다. ‘한국화, 계절을 그리다’는 제목으로 기획된 이 전시는 삼례문화예술촌이 특별기획한 시리즈 프로그램이다. 신사임당, 신윤복, 안견 등 익히 들어본 이들이 그린 「몽유도원도」,  「미인도」 등의 유명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교과서에서는 작은 삽화로 그려져 쉬이 지나칠 수 있던 명화들이 그 크기를 키워 섬세한 화풍으로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겪어보지 못 한 조선의 미를 그리워하며 넘어간 3 전시관에서는 지역 작가가 겉으로 드러난 감정들을 담아 그린 ‘징후적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다. 옆 4 전시관에서는 군민들이 만든 다양한 공예품을 볼 수 있다. 2 전시관은 전시가 준비 중이다.

전시만이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아니다. 양곡창고로 쓰였던 건물은 전시관 내벽과 외벽, 지붕 등에 과거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해 건물 자체를 살펴보는 것 역시 삼례문화예술촌의 큰 묘미이다. 이외에도 촉각, 미각 같은 오감을 모두 활용한 문화 체험 행사를 요일별로 즐길 수 있고 토요일은 야외마당에서 펼쳐지는 조선 시대 민속극과 버블·마술쇼를 지켜볼 수 있다. 

▲문학으로 재탄생한 삼례 책 마을

▲삼례헌책방에 책이 진열된 모습이다.
▲삼례헌책방에 책이 진열된 모습이다.

삼례문화예술촌에서 5분 정도를 걸어 삼례 책마을에 도착하면 낡은 양철 벽면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일제강점기 시절 수탈을 위해 사용되던 낡은 양곡창고가 지난 2013년 책을 주제로 한 도시 재생 사업을 통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삼례 책 마을은 총 4가지 동으로 이뤄져 있다. A동은 책 마을센터로 회의실,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B동은 북하우스로 헌책방과 카페로 이뤄져 있다. C동은 수장고, 학예연구실 등으로 이용된다. 마지막 D동은 북 갤러리로 공연, 전시 등 다양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된다. 특히 B동의 삼례헌책방은 문화센터의 거점 공간으로 약 1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전국 최대의 헌책방이다. 고서부터 화보, 그림책 전문 서적까지. 판매가 중단돼 이제는 볼 수 없는 책들도 이곳에서는 만날 수 있다. 북 페스티벌, 고서 대학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진행되는 삼례헌책방은 삼례 주민 간 소통의 장소이자 문화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삼례역을 등지고 몇 걸음 더 가다 보면 그림책미술관이 나타난다. 이곳 역시 과거 양곡창고를 재활 용한 시설로, 건물 외관에 ‘양곡 안전 관리’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요정들과 기차 등 귀여운 조형물이 반겨준다. 이는 영국 출신 작가 질 만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조형물이다. 현재 ‘요정과 마법 지팡이’라는 주제로 주인공 테디가 크리스마스 파티에 친구를 초대하며 생기는 일들을 담아낸 내용으로 기획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질 만의 원고 및 삽화 25점도 함께 구경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는 빅토리아시대의 그림책 3대 거장인 월터크레인, 랜돌프 칼데콧, 케이트 그리너웨이의 작품들이 상시 전시돼 있다.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작품들을 삼례 그림책 미술관에서 직접 만나 볼 수 있다. 아기자기한 조형물과 형형색색 그림책이 있는 이곳은 아이들에겐 놀이터, 어른들에겐 힐링 공간이 되고 있다.

▲아름다운 철길에 깃든 역사, 비비정

▲비비정에서 바라본 비비낙안의 모습이다.
▲비비정에서 바라본 비비낙안의 모습이다.

해가 지기 전, 노을 전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비비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고한 달빛 아래 백사 장에 쉬어가는 기러기 떼’를 뜻하는 비비낙안은 완산 8경 중 하나이다. 아름다운 비비낙안 전경을 볼 수 있는 비비정은 전주천과 삼천천이 합류하고 소양천과 고산천이 합류되는 만경강 한내의 삼례읍 남쪽언덕 위에 세운 정자다. 이 정자는 지난 1573년 무인 최영길이 건립했다. 그 후 철거 및 중건을 반복하다 지난 1998년 복원됐다. 비비정에서 바라본 만경강변의 전경은 ‘비비낙안’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정자 옆 계단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 비비정 예술열차가 나온다. 비비정 예술열차는 이제는 운영되지 않는 4량의 새마을호 폐기차를 리모델링한 공간이다. 1량은 식당, 2량은 아트숍, 3량과 4량은 카페로 구성됐다. 4량 야외 공간에서는 종종 음악공연이 진행된다. 비비정 예술열차의 레스토랑은 매주 월요일은 정기휴무이고, 동절기에는 1시간 일찍 마감한다. 아름다운 전경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거나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이곳을 더욱 즐기고 싶다면 일몰 시각에 맞춰 만경강 산책로를 따라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비비정 예술열차의 아름다운 모습 이면에는 역사적 아픔이 숨어있다. 열차 아래에는 만경강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폐철교가 있다. 이는 지난 1828년 일본이 호남의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된 구 만경강 철교이다. 구 만경강 철교는 당시 한강 철도 다음 두 번째로 긴 교량이었으며 일 제는 이를 이용해 호남평야의 미곡을 수탈했다. 이뿐 아니라 레스토랑 주변 양수장, 비비낙안 카페 옆 물탱크 등 일본인들에게 물을 공급한 흔적도 찾아볼 수 있었다.

삼례공용버스터미널로 돌아가 시내버스를 타고 전주로 돌아갔다. 시내버스를 이용해 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지역을 찾아볼 수 있었다. 새로운 문화공간을 찾거나 바쁜 일상 속 여유가 필요하다면 삼례로 떠나보는 것이 어떨까.

원소정 기자 thwjd5443@jbnu.ac.kr
김소은 기자 xoxoeun@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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