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살까지 건강하게 환자 진료하고 파

대학생 때 2000여 시간 봉사로 적십자 총재 표창
2000년부터 18년 보건의료원장 역임 후 4번째 취임
“지역 주민에게 상냥한 의사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지친 기자의 눈을 사로잡은 건 무지개색 넥타이를 맨 전 우리 학교 의대 교수 위상양 장수군보건의료원장이었다. “이 넥타이는 봉사단체 사람들끼리 맞춘 건데, 예쁘죠?”라고 말하는 위상양 원장은 의상조차 봉사와 관련돼 있었다. 위상양 원장의 가치관, 인생 경험 등이 가득 담긴 인터뷰는 무지개색 넥타이만큼 다채로웠다. 그에게 의사란 단순히 의료기술자가 아닌,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직업이다.

위상양 원장은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수석을 뺏겨본 적 없는 수재였다. 그는 중학생 시절 하숙집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국어 선생님과 함께 지냈다. 자연스레 그는 법대 진학을 희망했지만, 주변의 권유로 의대에 진학했다. 대학 생활 도중 여러 대외활동을 탐색하던 그는 특히 남을 돕는 활동에 힘썼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시간은 어느새 2000시간을 훌쩍 넘겨 적십자 총재 표창까지 받았다.

위상양 원장은 대학교 3학년 시절 미국 의료면허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비자를 받기 위해 6개월간 성실히 장수군보건의료원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의 미국행을 반대했고 마침 선배로부터 우리 학교 의대 교수직을 제의받았다. 그렇게 그는 3년 동안 우리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의대 교수 시절에도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그는 밤새워 근무하는 전북대병원 직원과 학생의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 포장마차의 일일 사장님이 됐다. “그때는 종종 깜짝 포장마차를 열어 직원들의 허기를 채워 줬죠.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교수직에서 내려온 후 그는 병원을 개원했다. 그가 진료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환자와의 소통이다. 진찰할 때 복잡하고 형식적인 설명보다는 이마에 손을 얹어 보곤 했다. 그는 “의사가 권위를 세울 것이 아니라 ‘내 가족이다’라고 생각하고 사랑과 정성으로 돌봐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장애인이나 형편이 어려운 환자에게 의료봉사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의료봉사의 원동력은 그에게 도움받은 환자들이다. 그들은 상추와 같은 농산물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완쾌한 환자가 인사하러 오는 등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감사함을 표현했다.

위 원장의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러나 장수군보건의료원장 시절 그에게 치료 받은 사람들의 성원에 힘입어 그는 병원을 정리하고 지난 2000년부터 임실군보건의료 원장으로 6년, 장수군보건의료원장으로 11년을 지냈다. 보건의료원장으로 지내는 동안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다. 환자 진료 외에도 의원과 공무원 사이의 갈등 중재 등 다사다난한 일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그의 좌우명인 ‘모든 일에 열심히 하자’라는 말을 되새겼다. 그는 의료예산을 받기 위해 일 년에 수차례 보건복지부에 직접 찾아갔다. 노력의 결과로 지역 의료 인프라 구축이 점차 이뤄졌다. “보건복지부에서는 도대체 왜 머리 하얀 노인이 저렇게 열성이냐고 말했다니까요.(웃음)”

올해로 위 원장은 80세를 맞이했으며 벌써 4번째 장수군보건의료원장을 맡고 있다. 그의 최종 목표는 90살까지 환자를 돌보는 것이다. 오늘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는 사랑과 정성을 담아 환자를 맞이하고 있다.

“주민에게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여전히 상냥한 의사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권지민 기자 jiipushed@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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