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소설의 대가, 그리고 근대사와 마주하다

기와 가득한 한옥부터 광활한 지평선, 황금빛 서해까지. 마음만 있다면 닿을 수 있는, 전북의 아름다운 여행지들이 있다. 이곳은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어 방문객들의 마음을 흔든다. 전북대신문이 대중교통과 도보로 누빌 수 있는 전북 곳곳의 명소를 취재했다. <편집자 주>

▲ 군산, 『탁류』의 배경이 되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소설 탁류의 시작을 알리는 구절이다. 탁류는 채만식의 작품으로, 지난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총 198회에 거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이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군산을 흘러가는 흐린 물, ‘탁류’에 비유하며 이야기의 운을 뗀다.

작가 채만식의 눈에는 맑은 금강이 군산에 이르러 탁류가 되는 모습이 왜곡된 자본주의 탓에 탐욕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탁류는 식민지 시대의 혼탁한 물결에 휩쓸려 무너지는 한 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 배경에는 일본의 극심한 수탈로 큰 아픔을 겪은 군산이 등장한다. 기자는 탁류에서 이름을 따온 군산 ‘탁류길’을 직접 걸으며, 군산의 원도심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1930년대의 흔적을 돌아봤다. 탁류길의 첫걸음은 군산 내항에 인접한 장미동에서 시작됐다.

▲ 고태수의 직장, ‘근대건축관’
버스에서 내리니 기자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일본 느낌을 풍기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건물의 설명이 적힌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외관상 마냥 예쁘게만 지어진 카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1930년대 건립돼 무역회사로 사용됐던 건물이었다. 심지어 과거에는 그 일대 전부가 쌀 수탈의 거점이었다. 물론 지금은 건축물을 개축하면서 근대문학 소통 공간 혹은 카페로 재탄생했지만, (구)군산세관, 근대건축관 등 일제강점기의 주요 시설인 금융기관과 공공기관이 많이 모여 있던 곳이다.

▲소설 탁류의 등장인물 동상 중 ‘고태수’의 동상이다. 심술 굳은 표정과 양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괴팍한 고태수의 성격을 보여준다.
▲소설 『탁류』의 등장인물 동상 중 ‘고태수’의 동상이다. 심술 굳은 표정과 양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괴팍한 고태수의 성격을 보여준다.

골목으로 더 들어가 보면 사람 형태를 한 동상이 보인다. 설명서를 보니 아주 반가운 이름이 적혀 있다. ‘고태수’, ‘겉보기에 잘 나가는 은행원이지만 실은 공금을 횡령해 미두와 주색에 탐식하는 난봉꾼이다.’ 탁류에 등장하는 인물을 동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고태수부터 계봉, 정주사 등까지. 등장인물의 설명과 표정을 읽는 것도 나름 재미가 쏠쏠했다. 동상 덕분에 탁류길을 시작하기 전, 소설의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특징을 다시 한번 상기시킬 수 있었다. 동상에서 5분 정도 걸으니 빨간 벽돌로 지어진 2층 높이의 건물이 보였다. 이 건물은 현재 민간에 매각된 이후 ‘근대건축관’이라는 이름으로 새 단장을 했지만, 과거에는 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다. 근대건축관은 군산의 근대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나라의 돈을 발행하는 발권 은행의 역할과 함께 일반적인 은행 업무를 겸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군산항을 통해 반출되는 쌀 수익금을 예치하고 농지 매입을 위한 자금을 융자해 주는 일을 했다. 또한, 이곳은 소설에서 고태수의 직장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은행에서 근무하며 나중에는 가짜 수표를 만들어 남의 돈을 은행으로부터 빼내는 몰상식한 일을 저지른다.

근대건축관 내부로 들어가면 군산의 근대 건축물을 재현한 모형과 과거 사용했던 외벽 타일, 빗물받이 지지대도 전시돼 있다.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8개의 기둥은 과거의 것을 그대로 보전하고 노출해 역사의 흔적을 남겨뒀다.

▲월명공원에서 채만식의 업적을 기리다
근대건축관에서 나와 다음 행선지인 월명공원으로 향했다. 10분 정도 걷다 보니 월명 공원 표지판이 보였다. 그런데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덩굴로 덮인 어두컴컴한 터널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고요한 터널 안을 바라보니 저마저도 복잡한 사연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다.

이 터널은 1926년, 군산시청 앞 도로인 중앙로와 수산업의 중심지인 해망동을 연결하고자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물자 반출을 더욱 쉽게 하려고 만들어졌으며 이름은 ‘해망굴’이다. 이 또한 근대 도시 군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구조물이다. 발 닿는 곳마다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가지고 있으니, 선조의 고통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해망굴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월명공원이 나온다. 가장 눈에 먼저 보인 건 어마어마한 크기의 하얀색 수시탑이었다. 이는 군산시의 발전을 위한 상징물로 1966년 세워진 상징탑이다. 하지만 막상 채만식 문학비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다 주민에게 길을 물어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월명공원에 세워져 있는 채만식 문학비이다.
▲월명공원에 세워져 있는 채만식 문학비이다.

수시탑에서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니 채만식 문학비가 세워져 있었다. 이는 탁류의 배경이 됐던 군산시가와 금강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문학적인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84년에 세워졌고 문학비에는 ‘탁류는 한 시대의 역사적 현장으로서 세태의 혼탁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인간의 탐구에 크게 기여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제 유서 깊은 이 고장 도도히 흐르는 바다를 굽어보는 자리에 정성을 모아 여기 영구 불망의 한 돌을 세워 그 업적을 같이 추모하게 됐으니 기쁜 마음 그지없다’라고 새겨져 있다.

▲정주사의 거처와 한창봉 쌀가게에 가보다
과거에 ‘콩나물고개’라고 불리던 곳이 있다고 해 찾아 나섰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가 지도에 등록돼 있지 않아, 길을 물어 다녀야 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주민에게 물으니, 눈이 커지며 놀라 말했다. “젊은 친구가 콩나물 고개를 어떻게 알아?” 길을 알려준 주민 덕에 콩나물 고개를 찾을 수 있었다.

▲콩나물 고개 벽면에 그려진 벽화이다. 쌀과 콩나물을 파는 가게가 그려져 있어 소설 『탁류』를 연상케 한다.
▲콩나물 고개 벽면에 그려진 벽화이다. 쌀과 콩나물을 파는 가게가 그려져 있어 소설 『탁류』를 연상케 한다.

콩나물 고개는 과거 조선인 거류지역으로 초가집 지붕이 마치 콩나물시루같이 다닥다닥 붙은 데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벽면에는 탁류를 연상케 하는 벽화와 콩나물 고개의 설명이 적혀져 있었다. 그런데 고개를 막상 올라가 보니 생각했던 거만치 빽빽이 들어선 집들의 모습은 연상하기 힘든 풍경이었다. 알고 보니 콩나물고개는 열악한 환경이나 가난에서 비롯된 게 아닌 과거 콩나물국을 팔던 가게가 있어서 만들어진 지명이었다.

▲콩나물 고개를 따라 올라가면 보이는 정주사집 소설비이다.
▲콩나물 고개를 따라 올라가면 보이는 정주사집 소설비이다.

또한 콩나물 고개는 탁류에서 정주사의 거처로, 자주 등장하던 공간이다.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정주사집 소설비를 만날 수 있다. 앞면에는 정주사집이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정주사 인물 설명과 정주사가 군산으로 이사를 오게 된 배경이 적혀있다. 고개 밑으로 내려가면 한창봉 쌀가게 소설비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웬 말인가. 소설의 몰입도를 위해 뒤 벽면에 그려놓은 쌀가게 그림은 다 지워져 있었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소설비만 쓸쓸하게 서 있었다. 심지어 주변에는 고물이 쌓여 있었다. 이에 군산시 문화관광국 관광진흥과 관계자는 “시간이 지나 벽화가 희미해진 것”이라며 “아직 구체적인 복원 계획은 없다”고 전했다.

탁류길 코스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기자가 소개한 장소 외에도 거리 곳곳에서 탁류와 관련된 벽화나 표지판을 여럿 발견했다. 군산은 채만식 문학에서 중요한 공간적 배경일뿐만 아니라 채만식 문학이 있게 한 요람과도 같은 곳이다. 군산에서 만난 김영애(전주시·43) 씨는 “채만식은 역사적 아픔을 문학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도록 큰 자산을 남겼다”며 “군산 곳곳에 남겨진 공간을 직접 경험해 보니 느낌이 더 새롭고 이곳들이 많은 이의 관심 속에 잘 보존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정세진 전임기자 tpwlsdl555@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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