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종 열사, 제1학생회관에서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다

항쟁이 일어난 알림의 거리,
이제는 문화 복합 공간으로

우리 학교 구성원과 지역민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구정문부터 시계탑 일대의 거리. 현재 ‘알림의 거리’라 불리는 그곳은 학생들의 생기 가득한 대학 문화 공간으로 익숙하다. 하지만 그곳은 과거 민주주의를 외친 학생들의 피와 절규가 묻어있다. 전대인의 눈물과 웃음이 깃든 현 알림의 거리. 올해 말 시작되는 학생회관 철거 및 신축 공사에 따라 이곳은 또 다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에 이곳과 관련된, 구성원의 희로애락 이 담긴 역사 속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는 말>

▲1960년 4월 4일, 전국 최초의 대학가 시위

▲1960년 알림의 거리 사진이다.
▲1960년 알림의 거리 사진이다.
▲제1학생회관이 들어서기 전, 1978년 알림의 거리 사진이다.
▲제1학생회관이 들어서기 전, 1978년 알림의 거리 사진이다.

‘학생들은 살아있다. 젊은이는 살아있다. 3.15 부정선거 규탄한다. 10시에 종치면 전부 종대 앞으로 모여라’ 1960년 4월 3일,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이던 전대열 학생이 문리대(현 인문대), 상 대, 법대 등 단과대학의 모든 강의실을 돌며 적었던 문구다. 전대열(정치외교·62졸) 씨는 이승만과 이기붕, 자유당이 저지른 부정선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위계획을 세우며 학생들을 모았다.

4월 4일 개강 첫날, 3.15 부정선거에 반하는 시위가 제1학생회관 일대에서 시작된다. 구정문 일대 거리는 학생들의 함성소리로 가득 찼다. “선거를 다시 하라”, “자유당 독재는 물러가라” 거리에는 시위 관련 유인물이 나비처럼 날아다녔고 그 가운데, 늘어나는 학생들의 숫자는 금세 7백여 명이 됐다. 민주주의로 똘똘 뭉친 수백 명의 학생들은 넓은 교정을 돌며 데모했고 이는 대학 민주화 운동의 시초가 됐다. 이날의 사건은 ‘학생 데모 미수, 경찰 사전출동으로’라는 제목으로, 전북일보 에서 단독 보도됐다. 기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담고 있다.

“작 4일 상오 9시 삼십 분경 시내 덕진동 전북 대학교에서는 학년말 휴가를 마치고 등교한 학생 들 간에 학생 데모가 행해지려다가 경찰의 사전 탐지로 좌절되었다. 이날 학교학생들은 등교하고 등교 휴정에 모여 강의 시간이 시작되기 전 수 분 동안 서성대고 일부 학생들이 정치구호를 외치며 또한 클럽활동을 하였다고 하는데···”

4.4 시위는 4.18 고려대 시위보다도 14일이나 앞섰으며 동학농민운동과 항일운동의 이념을 이어 받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최고의 엘리트 집단 인 대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을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건지벌의 영원한 벗’, 군사정권에 맞서다

▲제1학생회관이 완광된 이후 1980년 알림의 거리 모습.
▲제1학생회관이 완광된 이후 1980년 알림의 거리 모습.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찾아오나 싶었지만, 그 바람은 전두환 군사정권에 짓밟히고 말았다. 우리 학교 학생들의 분노와 저항 이 담긴 목소리가 건지벌서 다시 한 번 들끓었다. 1980년 4월 30일, 전국 최초로 “전두환 물러나라! 학원의 자율을 지켜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학생들은 제1학생회관 교수회 의실을 농성장으로 삼고 밤낮으로 학내·외에 시위 관련 유인물을 배포하며 집회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80년 5월 17일 밤 12시, 전국에 비상계엄령 이 선포됐고 계엄군이 이곳에 있던 35명의 학생을 연행해갔다. 당시 제1학생회관 2층에서 농성 중 이었던 이세종 열사는 캠퍼스를 유린한 공수부대 를 피해 옥상으로 올라갔지만 결국 계엄군의 무자 비한 폭력에 사망하고 만다. 그는 다음 날 새벽 1 시 30분경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당시 농학과 2학년이었던 이세종 열사는 두개골과 신장이 심하게 파열되고 온몸에 피멍이 든 채 발견됐다. 당시 군부는 아군의 실수에 의한 추락사로 발표해 5·18 죽음과 무관한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지난 1998년 5·18 광주민중항쟁의 첫 희생자로 공식 인정받았으며 19년이 지나서야 광주 망월동 신묘역 4-11에 안치됐다.

우리 학교 알림의 거리를 지나 제1학생회관을 향하는 길 중간 잔디밭 위에는 이세종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는 1985년의 5월 18일, 이 열사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하 지만 당시 학교는 군사정권의 압박에 못 이겨 건립을 반대했고 결국 비석을 훼손시키기까지 했다. 버려진 비석은 두 달 만에 학생들의 품으로 돌아 왔지만 결국 당국의 탄압으로 고향으로 옮겨졌다 가, 지난 1989년이 돼서야 지금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알림의 거리’, 학생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다

▲알림의 거리는 2000년을 넘어서면서 문화 복합 공간이 됐다. 사진은 2019년 알림의 거리 현장. 
▲알림의 거리는 2000년을 넘어서면서 문화 복합 공간이 됐다. 사진은 2019년 알림의 거리 현장. 

점심시간이나 공강 시간에는 삼삼오오 모인 학생 무리로 거리가 가득 채워진다. 과거 시위 거리로 기억됐던 구정문 일대가 이제는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지난 2002년, 학교는 서문에서 시계탑까지의 구간을 ‘알림의 거리’라고 이름 짓고 게시판을 집중적으로 설치했다. 또한 벤치와 정원수로 휴게 공간을 만들어 거리에 새로운 변화를 줘 지금의 모습과 비슷해졌다.

현재 알림의 거리는 각종 축제와 행사를 진행 하는 문화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3월에 새 학기를 시작하면 총동아리연합회는 동아리 홍보부스를 설치한다. 중앙동아리 8개 분과의 66개 동아리와 단대동아리 3개까지, 총 69개 동아리가 학생들의 발길을 붙잡으며 활기 넘치는 대학 생활의 시작을 알린다.

남민식(전자공학·23)은 “새학기에 중앙동 아리 부스를 보면 청춘을 즐기는 느낌이었다”며 “부스 체험을 통해 취향에 맞는 동아리에 들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알림의 거리는 대동제와 학문체의 주무대, 학생들의 버스킹 공간, 가족 단위 산책길 등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최기윤(기계시스템공학·23)은 “게시판이나 현수막으로 학교 행사나 대외활동에 관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며 더불어 “여러 홍보 부스나 버스킹 관람으로 문화생활까지 즐길 수 있어 자주 찾는 공간”이라고 전했다.

송주현 기자 202318983@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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