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주 '온실의 여인' (1960)

현재 전북도립미술관에서는 전북 남원 출신 이의주(李義柱 1926~2002) 화백의 전시가 개최되고 있다. 그는 초창기 원광대학교 초대 교수를 거쳐 1970년대 중반 이후 부산지역에 정착하면서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에서 대학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며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이의주는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나 해방 직후 개설된 전북 지역 최초의 사설 미술학원인 동광미술 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당시 동광미술연구소는 전북에서 태어나 일본 미술 유학을 다녀온 전북 서양화의 선구자 이순재, 박병수, 김영창이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었다. 연구소는 3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다가 폐쇄됐지만 이의주 외에도 천칠봉, 배형식, 이준성, 허은, 하반영, 소병호, 전영래 등 해방 이후 전북 화가들이 여기에서 배출되었을 만큼 의미 있는 미술교습소였다.

이후 이의주는 1949년 최초 설립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제1기생으로 입학해 배운성, 이응노, 진환 등에게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의주는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 에 양화 부문 <나부(裸婦)>를 시작으로 꾸준히 입선했고, 마침내 1960년 제9회 국전에 <온실의 여인>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면서, 1955년부터 1968년 3월까지 서울 양정고등학교에 미술 교사로 부임했다.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은 1966년 서울 신문화랑 에서 개최됐는데, 양정고등학교 교감으로 같은 교직에 몸담았던 화가 이병규가 소개 글을 작성했다. 또 이병규는 이번 전시에서 이의주의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 <온실의 여인>의 감상을 위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그는 이의주가 1960년 제9회 국전에서 <온실의 여인>을 출품하던 같은 해에 학교 온실의 동일 장소와 동일 모델로 유사한 그림을 남겼다. 이로써 이병규의 작품은 국전 이후 소실돼 국전 도록 도판으로만 남아있는 <온실의 여인>을 이번 전시를 통해 생생한 색채로 복원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한편 이의주는 《민족기록화전》의 작가로서도 활동한다. 《민족기록화전》은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박정희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문화정책으로, 민족의 가치를 강조하고 근대화를 홍보하기 위한 일종의 ‘시각미술사업’이었다. 이의주의 《민족기록화전》의 작품으로는 국군의 귀감이 된 <강재구 소령>(1967), <울산정유공장>(1969), <호남정유 >(1974), <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1976)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그는 정부 주도의 기록화 6점, 그 외 기록화로서 16점의 총 22점의 기록화를 남김으로써 그간 한국 근현대미술에 있어서 기록화 사업에 참여한 대표적 작가로 분류됐다. 이후 그는 국전 추천작가와 심사위원, 초대작가를 역임하고 목우회, 한국사실작가회, 한국신미술협회 등 당시 국내화단의 대표적인 구상 계열의 미술 단체에 몸담으며 작업 활동을 이어가다 2000년 8월, 향년 74세에 타계했다.

이의주는 그의 생애에 걸쳐 총 6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후 화백의 기념전은 2000년 타계 직후 한차례 추모전이 있었지만, 이번 전시는 그의 전북 미술사적 맥락을 파악하기 위한 대규모 회고전으로써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현장을 살펴볼 수 있는 탄탄한 전시로 구성됐다. 4개월여간 이어온 전시는 이번 주말에 종료된다. 아직 전시 관람을 하지 못했다면 발걸음을 서둘러 방문하도록 하자.

김미선 | 예대 강의전담교수·서양미술사

저작권자 © 전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